등장인물
한시우

엘라

데이터 노이즈 너머의 왕국 Episode #4
[에피소드: 달빛 디코딩과 깨어난 수호자]

장소: 하늘성 정문 앞 (The Main Gate)
시간: 자정, 인공위성 궤도 높이의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시각
“이건 단순한 문양이 아니야. 일종의… 생체 인증 보안 코드(Bio-metric Security Code)야.”
시우는 안경을 쓴 채 성문 표면에 새겨진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파란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복잡한 알고리즘이 떠올랐다.
[Decryption in Progress: 12%]
[Syntax Error Found: Line 4, 18, 22]
“생체 인증? 그게 뭔데? 손바닥을 대면 열린다는 뜻이야?”
엘라가 성문 옆, 사자 머리 모양의 석상에 손을 대보려 하자 시우가 급히 제지했다.
“아니, 만지지 마! 방화벽이 작동 중이야. 잘못 건드리면 ‘침입자’로 간주돼서 공격당해.”
시우는 아날로그 노트에 미친 듯이 수식을 적어 내려갔다. 고대어 룬 문자를 0과 1의 이진법으로 치환하고, 깨진 패턴의 규칙성을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이 문의 잠금을 풀려면 ‘올바른 파장’의 빛을 ‘정해진 순서’대로 주입해야 해. 엘라, 네 랜턴이 바로 그 ‘키(Key)’ 역할을 할 수 있어.”
그때였다. 쿵, 하는 묵직한 진동이 발밑에서 느껴졌다.
성문 양옆을 지키고 있던 거대한 석상들의 눈에서 붉은 노이즈가 번쩍였다.
[Warning: Intruder Alert]
[System Defense Mode: Activated]
[Mob: Stone Guardian (Lv. Unknown)]
“시우… 저기, 석상들이 움직이는데?”
엘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3미터가 넘는 석상들이 끼기긱거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창을 겨누기 시작했다.
“젠장, 해킹 시도를 감지했나 봐. 시간 없어! 내가 코드를 불러줄 테니까, 너는 랜턴 빛을 저기 문양 홈에 정확히 쏴야 해!”
“저 거인들이 우릴 찌르기 전에 말이지? 알겠어, 서둘러!”
엘라는 랜턴을 들어 올리며 석상 앞을 가로막았다.
“오지 마! 물러가라구!”
엘라가 랜턴의 빛을 강하게 터뜨려 시야를 방해했다(Flashbang). 석상들이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무거운 발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창끝에 붉은 데이터 스파크가 튀었다.
“첫 번째! 왼쪽 상단 45도, 빗살무늬! 빛의 강도는 약하게!”
시우가 소리쳤다.
엘라는 날아오는 석상의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몸을 돌렸다.
“약하게… 이렇게?”
그녀가 조절한 부드러운 빛줄기가 정확히 문양에 스며들었다. 띠링, 하는 맑은 알림음과 함께 첫 번째 잠금이 풀렸다.
“좋아! 다음은 중앙, 태양 문양! 이번엔 최대로 강하게! 맥스 출력(Max Output)으로!”
하지만 석상 하나가 시우를 노리고 창을 내리찍으려 했다. 시우는 분석 모드로 공격 궤도를 읽었다.
[Trajectory Predicted: Impact in 0.8s]
[Evasion Chance: 15%]
‘피하기 늦었어.’
그 순간, 엘라가 몸을 날려 시우를 밀쳐내고 랜턴으로 창을 받아냈다. 캉! 하는 굉음과 함께 엘라가 뒤로 밀려났다.
“엘라!”
“난 괜찮아! 문부터 열어! 저게 마지막이지?”
엘라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랜턴을 성문 중앙의 태양 문양에 조준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록빛으로 빛났다.
“부탁이야… 열려라!”
랜턴에서 눈이 멀 것 같은 황금빛 기둥이 뿜어져 나와 성문을 강타했다. 시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노트에 마지막 엔터키를 치듯 점을 찍었다.
“명령어 입력… 승인(Execute)!”
[Access Granted]
[Welcome, Administrator]
우우웅―
거대한 기계음과 함께 성문의 회로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좌우로 갈라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격을 퍼붓던 석상들의 눈에서 붉은 빛이 꺼지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허억… 허억…”
바닥에 주저앉은 엘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우는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추어올리며 엘라에게 다가갔다.
“다친 데 없어? 무모하게 몸으로 막으면 어떡해.”
“네가 그랬잖아. 우린 파트너라고. 네가 머리를 쓰는 동안 난 몸을 써야지.”
엘라가 씩 웃으며 흙투성이가 된 옷을 털고 일어났다. 시우는 툴툴거리면서도 그녀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HP: 85% – Stable].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두 사람은 열린 성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그들이 상상했던 중세의 성 내부가 아니었다.
[Zone Entered: The Central Server Garden]
거대한 홀의 천장은 우주처럼 끝없이 높았고, 바닥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전선과 덩굴이 기괴하게 얽혀 만들어진, 빛나는 거대한 ‘세계수(World Tree)’가 서 있었다. 나무의 잎사귀들은 수많은 모니터 화면처럼 세상의 모든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와… 이게 다 뭐야?”
엘라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우는 눈앞의 광경에 압도되면서도, 본능적으로 데이터를 읽기 시작했다.
“이건 나무가 아니야. 이 세계를 관리하는… 메인 서버야.”
그때, 세계수 앞의 허공에서 홀로그램 같은 소녀의 형상이 지직거리며 나타났다.
“오류… 수정… 방문자를 환영… 합…니다…”
깨진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존재를 본 엘라가 깜짝 놀라 외쳤다.
“어? 저 아이… 나랑 똑같이 생겼잖아?”
시우의 눈이 커졌다. 홀로그램 소녀의 데이터 값은 [Identity: Ella_Backup_Ver.1.0]이라고 표시되고 있었다.
“엘라,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보다 더 복잡한 문제에 휘말린 것 같은데.”
시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노트를 꽉 쥐었다. 하늘성의 비밀은 이제 막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