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한시우

엘라

데이터 노이즈 너머의 왕국 Episode #5
[에피소드: 기억의 백업과 울고 있는 서버]

장소: 하늘성 내부, 중앙 서버 가든 (Central Server Garden)
시간: 데이터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Zero Time’ 구역
“엘라, 가까이 가지 마. 저건… 사람이 아니야.”
한시우가 엘라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그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홀로그램 소녀의 데이터는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Identity: Ella_Backup_Ver.1.0]
[Status: Corrupted (78%)]
[Last Login: 100 years ago]
“하지만 시우… 나랑 똑같이 생겼어. 그리고 너무 슬퍼 보여.”
엘라는 시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홀린 듯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홀로그램 소녀는 눈을 감은 채 공중에 부유하고 있었고, 그녀의 몸을 구성하는 푸른 입자들이 마치 눈물처럼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흩어지고 있었다.
치지직― 팟.
갑자기 세계수(World Tree)의 줄기에서 굵은 전선 덩굴들이 튀어나와 홀로그램 소녀를 휘감았다. 붉은 노이즈가 소녀의 형상을 먹어 치우려 하고 있었다.
“아아악!”
홀로그램이 비명을 지르자, 현실의 엘라가 동시에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으윽…! 아파… 가슴이 너무 뜨거워.”
“동기화(Synchronization)? 젠장, 저 백업 데이터랑 네가 연결되어 있어!”
시우는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저 붉은 바이러스가 백업 데이터를 삭제하면, 연결된 엘라에게도 치명적인 데미지가 갈 것이 분명했다.
[Alert: Virus Intrusion Detected]
[Target: Administrator Access Key (Ella)]
“엘라! 정신 차려! 네 랜턴을 켜! 저 덩굴들이 데이터를 덮어쓰기 전에 막아야 해!”
시우는 노트와 펜을 꺼내 들고 세계수의 뿌리 쪽으로 달려갔다. 나무의 표피는 껍질이 아니라 수만 개의 서버 랙(Server Rack)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붉게 점멸하는 단말기를 찾아 펜을 꽂아 넣듯 갖다 댔다.
“물리적 해킹 시작. 방화벽 우회, 코드 재작성!”
시우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노트에 적히는 것은 글씨가 아니라 0과 1의 방류였다.
“시스템, 들어라! [Command: Stop Deletion]!”
시우의 외침과 함께 세계수의 붉은 빛이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엘라가 고통을 참으며 일어섰다. 그녀의 랜턴이 공명하듯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아이를… 놔줘!”
엘라가 랜턴을 높이 들어 올리자, [정화의 빛]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빛은 전선 덩굴을 타고 흘러 들어가 붉은 노이즈를 태워버렸다.
“지금이야, 시우! 연결해!”
시우는 안경의 줌(Zoom) 기능을 최대로 당겼다. 홀로그램 소녀의 가슴 부근에 깨져 있는 데이터 조각이 보였다. 복구가 필요한 ‘핵심 파일’이었다.
“엘라, 랜턴 빛을 저 소녀의 심장에 집중해! 데이터 전송 경로를 열게!”
“알았어!”
엘라의 랜턴에서 뻗어 나간 빛줄기가 홀로그램 소녀의 가슴에 꽂혔다. 동시에 시우가 노트에 마지막 엔터키를 그려 넣었다.
[Recovery Process: 99%… Complete.]
파앗―!
눈부신 빛과 함께 덩굴들이 떨어져 나갔다. 홀로그램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엘라와 같은 초록색이었지만, 훨씬 더 깊고 고요한 데이터를 담고 있었다.
홀로그램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깨진 기계음이 아닌, 맑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나의 ‘현재’.”
엘라는 멍하니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야? 왜 내 모습을 하고 있어?”
홀로그램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엘라의 뺨을 만지려 했다. 하지만 손은 닿지 않고 통과했다.
“나는 과거의 너이자, 이 숲을 관리하던 ‘초기 설정값(Default Setting)’. 하지만 시스템이 오염되면서 나는 여기에 갇혔어.”
시우가 끼어들었다.
“초기 설정값? 그럼 엘라가 만들어진 존재라는 거야? NPC처럼?”
홀로그램 소녀가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시우는 순간적으로 데이터 분석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Access Denied].
“아니요, 정보 수집가님. 엘라는 ‘선택받은’ 그릇. 나는 실패한 관리자일 뿐.”
홀로그램 소녀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다해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붉은 노이즈, ‘버그 퀸(Bug Queen)’이 깨어나고 있어. 그녀가 숲의 코드를 전부 0으로 돌리기(Reset) 전에… 최상층으로 가야 해.”
“최상층? 거기에 뭐가 있는데?” 엘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거기에… 이 세계의 ‘전원 스위치’가 있어. 그리고 네 잃어버린 진짜 기억도.”
홀로그램 소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작은 빛의 결정체를 엘라의 랜턴 속으로 밀어 넣었다.
[Item Acquired: Memory Fragment #1]
[Skill Level Up: Lantern Output +50%]
“부디… 숲을, 아니 우리를 구해줘.”
말을 마친 홀로그램은 수만 개의 빛 조각으로 흩어져 세계수 속으로 흡수되었다. 거대한 중앙 서버 가든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사라졌어…”
엘라는 랜턴을 소중히 껴안았다. 랜턴 안의 불빛이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하고 안정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시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펜을 돌렸다.
“선택받은 그릇, 전원 스위치, 초기 설정값… 생각보다 판이 커졌는데. 엘라, 너 괜찮아?”
엘라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이전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
“응. 이상하게… 슬프지 않아. 오히려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아.”
그녀가 세계수 뒤편, 위로 이어지는 나선형 데이터 케이블 계단을 가리켰다.
“올라가자, 시우. 저 위에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네가 왜 이 안경을 쓰게 됐는지에 대한 답이 다 있을 거야.”
시우는 피식 웃으며 안경을 추어올렸다.
“내 안경 얘기는 안 했는데? 감이 좋은 건지, 데이터가 업데이트된 건지.”
“빨리 와! 버그 퀸인지 뭔지가 쫓아오기 전에!”
두 사람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에, 세계수의 모니터 잎사귀 하나가 붉게 변하며 불길한 메시지를 띄웠다.
[System Warning: Bug Queen is Awakening…]
[Target Location: Floor 99]